제 699 호 [편집장의 시선] 공정, 이기심의 다른 말
공정, 공평하고 올바름. 2021년 현재, 가장 흔하게 볼 수 있고 뜨겁게 논의되는 단어는 ‘공정’이 아닌가 싶다. 대학 입시, 학교 시험, 취업 등 많은 시험과 선별에서 공정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정을 강조하는가? 불행히도 그 이유는 ‘내 권리를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야 하는 상황은 어떨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사실 도덕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내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내 권리가 침해될 상황이 눈앞에 닥쳐도, 우리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그렇게 행동하고 있을까?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거북이가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토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북이를 토끼와 같은 출발선에 세운다면, 그것은 과연 공평한가? 시합의 주최가 토끼와 거북이의 시합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합은 공정한가? 반면 ‘돈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 혹은 더 먼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문장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먼저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평한 기회를 얻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공정을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이 문장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역차별’이라 말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가 오히려 다른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세심한 고려와 충분한 논의 없이 정책이 마련된다면, 물론 역차별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는 단지 내가 얻었을 수도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너무나 쉽게 역차별을 입에 올리고 있다. 심지어는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도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내가 손해 볼 것 같은 상황에서는 공정을 주장하고, 내가 이득을 취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입을 꾹 다문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일이다. 시험 기출을 모아둔 자료를 흔히 족보라 칭하는데, 대학 시험의 경우 많은 과목이 전년도 문제와 유사하게 출제되므로 족보를 가진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저작권이 있는 시험 문제가 공유된다는 것부터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더러,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족보의 유무가 시험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면 시험의 공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노력으로, 내 돈으로 족보를 구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족보가 답안지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당당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과목의 족보가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 학기 동안 내가 수학한 것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단지 답을 맞혀 높은 성적을 받겠다는 욕심에 답안지와 다름없는 족보를 이용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시험을 치루는 다른 학우를 무시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눈에 보이는 상처와 피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저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족보가 없을 때는 족보가 있는 타인을 향해 불공평하다 생각하고, 내가 족보가 있을 때는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미 우리 사회는 당당히 공정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침묵으로 타인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정의를 외면한다. 내가 주장하는 공정이 과연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맞는가? 사실 공정은 공존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 채, 나를 위한 공정을 주장할 뿐이다. 내 권리가 빼앗기는 기분이 들 때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 권리가 처음부터 내게 공정하게 주어진 것이 맞는가? 내가 다수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들, 이루려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회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허울뿐인 가치를 좇기 위해 사람이라는 가치를 외면하지 말자. 공정이 아니라 공존을 외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좁은 시야에 갇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
윤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