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9 호 [영화로 세상읽기] 떨어지지 않기 위한 부단한 날갯짓
- 영화 <벌새>, 2019(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한 동안 육교를 건너지 못했던 적이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갈아타야 할 버스를 놓쳐 여느 날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던 어느 날, 꽤 길고 높은 육교를 건너야만 했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야 할 버스가 불과 몇 정거장 전에 있어 마음이 급했는데도. 그 버스를 놓치면 정말 지각이라, 어쩔 수 없이 육교를 건넜다. 꾸역꾸역. 정말 지옥 불 위를 걷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육교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쿵쿵 떨어지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얼른 이 육교의 끝에 도달하기만을 바랐다. 그렇다고 뛸 수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으니까.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눈을 감은 채로 육교를 건널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 날 나는 천 리 길 같았던 육교를 건넜으므로 지각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뒤로도 나는 그 어떤 육교도 건널 수 없었다. 봉사활동을 다니던 장애인복지관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나무 바닥이 깔린 육교를 건너야만 했는데, 그 육교는 특히나 내게 공포로 다가왔다. 삐그덕 소리가 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금이 가기도 한 육교. 높기도 높았고, 그 아래는 1번 국도라 큰 차들이 쌩쌩 무섭게 지나다녔다. 끝나는 시간이 늦어 하늘도 어두웠고, 여러모로 그 육교는 내게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결국 그 봉사는 더 다닐 수 없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육교를 건너지 못하게 된 것은 수험생에게 가해지는 압박 때문이었다. 성적을 올려야만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는데, 결국 내가 성적을 올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압박.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내 미래를 떠올리면 밀려오는 우울함.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그 감정들이 쌓이고 싸여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신호를 보냈다. 너 지금 우울하다고, 너 지금 불안하다고, 너 지금 위험하다고.
1994년 은희가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2018년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은희는 강남 대치동에 살고 있다. 강남, 그 중에서도 대치동은 사교육의 메카로 영화에서도 이곳은 학생들이 엄격하게 자신을 누르고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은희가 하고 싶은 것은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애도 하고 싶고, 친구와 놀러 다니고도 싶고, 자신을 예쁘게 단장하고 싶었다. 사실 은희의 욕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춘기 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은희는 이 모든 것들을 가족과 학교에 의해 통제 당한다. 남들은 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공부만 잘하던데, 꾸역꾸역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시도하는 은희는 모두에게 ‘찍히고 만다.’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 고통 받고 있는 은희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가족이 먼저 떠오르지만, 은희의 가족은 은희의 마음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심지어 은희의 아빠는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며 기성세대의 가치를 학습시키고, 오빠는 은희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은희를 때리고는 한다. 은희가 오빠에게 맞는다는 것을 은희의 가족들은 모두 알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빠를 막아주지 않았다. 오빠의 폭력을 막고, 은희를 구해줄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희를 외면했다. 학교에서 일탈 학생으로 낙인찍힌 은희는 집에서조차 위로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은희에게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은 바로 한문 선생님 영지였다. 은희가 다니던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선생님 영지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은희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은희와 생각이 다르면 은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주었다. 은희가 대화하고 싶을 때 흔쾌히 곁을 내어주었고, 은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은희가 은희의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런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은희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은희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영지뿐이었고, 영지로 인해 은희의 마음에는 새로운 싹이 이제 막 트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이 생긴 은희에게 영지의 죽음은 엄청난 상실과 슬픔,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실 은희의 모습에 내 학창시절을 투영시켜 보던 나로서는 삶의 위로로 상징되는 영지의 죽음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리의 붕괴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꼭 내가 건너지 못하던 육교가 결국 무너져 내린 것만 같아서. 은희와 영지가 서로를 위로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기를 기대했는데, 비극적인 결말이 오랜 시간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렇다면 왜 <벌새>는 영지의 죽음으로 영화의 막을 내렸을까. 아마도 그 답은 ‘사회 비판’에 있는 것 같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는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그 중에는 등교 중이던 어린 학생들도 많았다. 그런데 사실 이 붕괴는 부실공사와 부실점검으로 인한 것이었다. 당초 성수대교가 건설사의 횡령으로 부실공사가 된 데 이어, 붕괴 당일 서울시가 대교에 금이 간 것을 알았음에도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사고에 많은 국민들은 분노했다. 사교육 과열과 학벌주의 역시 <벌새>가 비판하는 사회 문제이다. 아이들은 닭장 속 닭처럼 지정된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할 뿐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문제를 풀고 또 푼다. 간혹 이 행위에 의문을 품는 아이가 있어도, 그 의문이 저항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저항은 곧 낙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벌새>가 보여주고 있는 이 모든 사회 문제들이 2021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실공사로 대표되었던 인간의 이기심은 오늘 날에도 다양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학벌주의는 오히려 점점 심해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려 나가고 있다. 어쩌면 감독은 영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전달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마지막 위로마저 결국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라고.
윤소영 기자